기후성의 역대 성주
1 니카이도 유키마사(二階堂行政)
니카이도 유키마사는 귀족 후지와라 가문의 일원으로 12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활약했다. 그는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쇼군이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1147~1199)와 친척 관계였는데, 그 연으로 가마쿠라 막부의 관리로 등용되었다.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유키마사는 1201년부터 1204년 사이에 이곳 긴카잔 산에 이나바 산성이라고 불리는 성을 건설했다. 이때 지어진 이나바 산성은 후에 기후성으로 재건되었다.
2 나가이 신자에몬노조(長井新左衛門尉)
나가이 가문은 원래 미노국(기후현 남부)의 슈고다이(守護代: 지방의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직무)였던 사이토 가문의 가신이었다. 나가이 가문은 사이토 가문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권력을 장악하고 1525년 말까지 사이토 가문을 완전히 쓰러트렸다. 나가이 가문의 일원으로서 이 정쟁에 참여한 나가이 신자에몬노조(생몰년 미상)는 본래 무사 출신이 아니라, 교토에서 승려로 성장하여 기름 장수로 성공했다가 후에 나가이 가문에 가담한 경력을 지닌 인물이다. 이후 신자에몬노조는 나가이 가문의 가신이 되어 이나바 산성을 거성으로 삼았다. 신자에몬노조의 아들인 사이토 도산(1494~1556)은 1533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이나바 산성을 물려받았다.
3 사이토 도산(斎藤道三)
‘미노의 살무사’란 별명으로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사이토 도산은 냉혹한 전술로 유명했다. 1547년 가노구치 전투에서 오다 노부히데(1510~1551)를 물리친 일을 계기로 그는 전국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전투 후, 도산은 딸인 노히메(1533-35~1612)를 노부히데의 아들 오다 노부나가(1534~1582)에게 시집보내고 평화협정을 맺었다.
1556년경 도산은 누가 그의 후계자가 될지에 대한 추측이 주변에서 난무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도산의 맏아들인 사이토 요시타쓰(1527~1561)가 그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았고, 또한 요시타쓰보다 재능 있는 사위 오다 노부나가에게 후계 자리를 물려줄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자신의 출생과 도산의 의도에 의문을 품은 요시타쓰는 정당한 후계자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다지기로 결심하고 1556년, 나가라가와 전투에서 아버지 도산을 습격했다.
요시타쓰는 사이토 가문의 병사 대부분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여 62세였던 아버지 도산을 나가라가와 전투에서 패배시키고 살해했다. 노부나가는 장인을 돕기 위해 지원군을 파견했지만, 제시간에 닿지 못했다. 사이토 도산의 머리는 전투 중에 빼앗겼다가, 후에 기후성 북쪽에 있는 소후쿠지 절 근처의 도산즈카(도산의 무덤)에 매장되었다.
4 사이토 요시타쓰(斎藤義龍)
사이토 도산(1494~1556)의 아들인 사이토 요시타쓰는 평균 신장이 157cm였던 시대에 197cm의 건장한 체구를 지녔고, 아버지 도산만큼이나 무자비한 기질을 지닌 인물이었다. 1554년, 60세가 된 도산에게 후계자 문제는 점점 더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요시타쓰에 대해서는 도산의 아들이 아니라, 도산의 옛 주군이었던 도키 요리노리(1502~1582)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다. 또 다른 소문에 의하면 요시타쓰가 아닌 다른 아들, 혹은 그의 사위인 오다 노부나가(1534~1582)에게 대를 물려줄 것이라고도 했다. 당시 요시타쓰는 기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사기 산성을 거점으로 삼고 후계자 문제를 매듭지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1556년, 요시타쓰는 형제들을 죽이고 사이토 가문의 병사 대부분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한 뒤, 나가라가와 전투에서 아버지를 공격했다. 도산은 이 전투에서 살해되었고 요시타쓰는 기후성을 장악했다.
노부나가는 장인의 복수를 위해 여러 차례 요시타쓰를 토멸하려 군사를 일으켰지만, 매번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1559년에 요시타쓰는 교토에 방문해 있던 노부나가를 암살하기 위해 화승총으로 무장한 저격수를 파견했지만, 그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요시타쓰가 1561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아직 10대였던 아들 사이토 다쓰오키가 그의 뒤를 이었다.
5 사이토 다쓰오키(斎藤龍興)
1561년, 사이토 다쓰오키는 고작 13세의 나이로 사이토 가문을 계승했다. 1564년, 다케나카 한베에(1544~1579)는 사이토 가문의 무사에게 모욕을 당하고 자신을 모욕한 무사를 처벌해 줄 것을 다쓰오키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다쓰오키가 이를 거부하자, 다케나카 한베에는 다쓰오키의 목숨을 노린다는 거짓 계획을 세우고 불과 16명의 무사들로 성을 공격해 보복했다. 하지만 다쓰오키는 큰 군세의 병력에게 공격당했다고 착각하고 성과 가신들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리하여 다케나카 한베에는 어렵지 않게 기후성을 손에 넣게 되었다. 성은 나중에 다시 다쓰오키에게 돌려줬지만, 성을 포기하고 도망쳐 버린 다쓰오키의 비겁함은 수치스러운 행동으로 주변의 눈에 비춰졌다.
1567년에 오다 노부나가(1534~1582)가 공격했을 때, 다쓰오키 휘하의 많은 병사들은 이때의 주군의 행실을 기억하고 오다군에게 투항하거나 도망쳤다. 노부나가는 사이토 가문의 견고한 성을 비교적 쉽게 수중에 넣고 자신의 거처를 이곳으로 옮긴 후, 성과 성하마을의 이름을 ‘기후’로 바꿨다. 다쓰오키는 성에서 도망쳤다가 1573년에 도네자카 전투(이치조다니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6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오다 노부나가는 전국 시대(1467~1600) 말기에 전국 통일을 도모한 세 영웅(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중 첫 번째 인물이다. 군사적인 면에서 천재적인 능력을 지녔던 그는 장창과 화승총을 사용하는 새로운 전술을 개발했다. 한편으로는 축성 기술도 크게 발전시켰다.
1551년에 노부나가의 아버지인 오다 노부히데가 사망한 후 노부나가는 가문의 힘을 통합하여, 1560년까지 지금의 기후와 나고야 주변의 지역을 지배하에 두었다. 오케하자마 전투(1560)에서 노부나가는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이끄는 25,000명의 군세를 화승총으로 무장한 불과 3,000명의 병력으로 격퇴했다. 1567년에는 이나바 산성을 수중에 넣고 성과 성하마을의 이름을 ‘기후’로 바꿨다. 그 후 약 10년 동안 성을 확장하여, 1576년에 현재의 시가현에 새로 완성된 아즈치성으로 옮길 때까지 기후성을 거점으로 사용했다.
영향력과 군사력이 높아진 노부나가는 더욱 야심차게 자신의 힘으로 천하를 통일하려 노력했다. 1575년에는 나가시노(아이치현)에서 벌어진 대규모 총격전에서 강력한 힘을 자랑하던 다케다 가문의 군세를 꺾었다. 1578년에 우에스기 겐신이 사망하면서 구심력이 약해져 있던 우에스기 가문을 산하에 두었고, 1580년에는 권력에 반기를 든 불교 종파 일향종의 봉기 집단을 섬멸했다. 1581년에는 현재의 미에현 이가 지방을 장악하고, 1582년 초에는 다케다 가문을 완전히 멸망시켰다.
아케치 미쓰히데(1528~1582)는 오다 노부나가가 가장 신뢰한 가신 중 한 명이었다. 1582년 6월, 노부나가는 주고쿠 지방에서 진행 중이던 전투에 지원군을 보낼 것을 미쓰히데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미쓰히데는 자신의 13,000명 규모의 부대를 이끌고 노부나가가 당시에 머물고 있었던 교토의 혼노지 절로 향했다. 미쓰히데는 주군인 노부나가의 신뢰를 배신하고 그를 공격했다. 압도적 다수의 군세를 가진 미쓰히데의 공격을 받은 노부나가는 화살에 부상을 입고 안쪽 깊숙한 방으로 몸을 피했다가 결국 칼로 목숨을 끊었다. 그로부터 몇 주 후, 미쓰히데는 야마자키(교토부) 전투에서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의 군대에 패해 도주하던 중에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노부나가가 죽은 후, 그가 목표로 한 천하통일에의 길은 히데요시가 이어받게 되었다.
7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
오다 노부타다는 오다 노부나가(1534~1582)의 장남으로 노부나가로부터 기후성을 물려받아 1576년부터 1582년까지 거성으로 삼았다.
노부타다는 아버지 노부나가와 함께 수많은 주요 전투에 출전하며 실력을 갈고 닦았다. 그는 스스로도 대장으로서 여러 전투에서 군을 통솔했는데, 1575년의 이와무라성 포위전에서는 강력한 적이었던 다케다 가문을 격퇴했다. 또한 시기 산성(1577)과 다카토성(1582)에서 다케다 가문을 포위했을 때 지휘를 맡기도 했다.
오다 가문과 다케다 가문 사이의 평화를 위한 협정의 일환으로 1561년, 노부타다는 다케다 신겐(1521~1573)의 딸인 마쓰히메(1561~1616)와 약혼했다. 그러나 그 평화협정도 5년 후인 1572년에 신겐의 군대가 인접한 미카와를 침략해 오다 가문의 우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를 공격한 것이 원인이 되어 파기되었다. 이후의 전투에서는 노부나가가 교토의 혼노지 절에 머물고 노부타다가 니조성의 부대와 함께 있을 때, 노부나가의 중신이었던 아케치 미쓰히데(1528~1582)가 노부나가를 배신하고 혼노지 절로 쳐들어갔다. 노부나가를 쓰러뜨린 후, 아케치 미쓰히데의 군대는 니조성에 있는 아들 노부타다를 노렸다. 엄청난 수의 아케치군에 포위된 노부타다는 그 자리에서 칼로 목숨을 끊었다. 노부나가와 마찬가지로 노부타다의 머리도 이후 발견되지 않았다.
8 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
오다 노부타카는 오다 노부나가(1534~1582)의 삼남으로 1582년부터 1583년까지 기후성의 성주였지만, 이세 지방(미에현 동부)을 중시한 아버지 노부나가에 의해 간베 가문의 후계자로서 양자로 입양되었다. 1582년에 아버지 노부나가로부터 시코쿠를 정벌하라는 명을 받은 노부타카가 시코쿠 지방으로 향했지만, 그 사이 노부나가는 교토에서 신뢰하던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1528~1582)에게 배신당해 공격을 받고 사망했다. 그 소식을 들은 노부타카는 마찬가지로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와 재빨리 연대하여 교토 교외의 야마자키에서 아케치 미쓰히데를 처단했다.
아버지 노부나가와 맏형 노부타다(1557~1582)의 죽음으로 노부타카와 둘째 형 노부카쓰(1588~1630) 사이에서 오다 가문의 후계자 문제가 불거졌다. 결국에는 아직 어렸던 맏형 노부타다의 아들 히데노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견 하에 가문을 계승하게 되었다. 노부타카는 기후성을 수중에 넣었지만, 히데요시가 아버지 노부나가의 지위를 빼앗으려는 계략을 꾸민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히데요시를 공격하기 위해 가신 중 하나였던 시바타 가쓰이에와 손을 잡았다. 1583년에 시바타 가쓰이에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시즈가타케(시가현)에서 전투를 벌인 끝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승리하고 패한 시바타 가쓰이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가쓰이에를 잃고 지위가 약화된 노부타카는 히데요시 편에 속해 있던 형 노부카쓰가 기후성을 포위하고 공격해오자, 결국 기후성을 내주게 되었다. 그 후 노부타카는 지타 반도(아이치현)의 우쓰미로 추방되었다가 노부카쓰의 명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9 이케다 모토스케(池田元助)
이케다 모토스케는 오다 노부나가(1534~1582)가 어렸을 때부터 가신으로 종사하다가 1583년부터 1584년 사이에 기후성의 성주가 된 인물이다. 그는 노부나가가 이끄는 수많은 전투에 참전한 숙련된 무장이었다. 1582년 아와지 섬 침공 당시, 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와 함께 싸우고 있었을 때 오다 노부나가는 교토의 혼노지 절에서 사망했다. 그 소식을 들은 모토스케는 히데요시의 부대에 가담하여 교토 교외의 야마자키에서 노부나가를 죽인 아케치 미쓰히데와 전투를 벌였다. 오다 가문의 후계자를 둘러싼 다툼에서 이케다 가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차남인 노부카쓰(1558~1630)를 지지했다.
1583년 이케다 가문이 미노국(기후현 남부)의 대부분을 통치하게 되면서 모토스케에게는 기후성이 주어졌다. 1584년 고마키(아이치현) 전투 때, 도요토미군은 상대편 도쿠가와군의 대부분이 전장에 나간 탓에 도쿠가와군의 거점인 오카자키성을 지키는 인원이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케다 모토스케는 부대의 일원으로 파견되어 오카자키성을 침공했지만, 그 계획은 도쿠가와군에게 발각되었다. 도쿠가와군은 이어진 나가쿠테(나고야 교외) 전투에서 도요토미군에 반격을 가했다. 이 전투 중에 모토스케가 전사하자, 아우인 데루마사가 기후성을 물려받았다.
10 이케다 데루마사(池田輝政)
이케다 데루마사는 1584년부터 1591년까지 기후성의 성주였다. 데루마사는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노부나가의 여러 주요 전투에 참가했으며, 노부나가가 사망한 후 이케다 데루마사의 일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를 섬겼다. 1584년 고마키 나가쿠테(아이치현) 전투에서 아버지 쓰네오키(1536~1584)와 형 모토스케(1559~1584) 모두가 전사하자, 데루마사는 기후성을 포함한 미노국의 대부분을 물려받았다.
1590년 요시다성(아이치현)으로 거처를 옮긴 그는 1594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딸 도쿠히메(1565~1615)와 결혼했다. 1598년에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난 후, 데루마사의 충성심은 그의 장인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로 향했다. 1600년 이케다 데루마사와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오다 히데노부(1580~1605)가 거성으로 삼고있던 기후성을 공동으로 공격했는데, 기후성은 불과 하루 만에 함락되었다.
전국 시대의 종언을 고한 세키가하라(기후현) 전투에서 데루마사는 자신이 속한 동군이 상대편인 서군의 모리 가문에게 평야에서 협공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난구산 정상에서 방어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 공적으로 데루마사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히메지성(효고현)을 이에야스로부터 하사받았다. 데루마사는 1613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말년에 매우 강한 권력과 영향력을 가졌던 그는 사이고쿠노 쇼군 즉, 서쪽의 쇼군이라는 칭호로 불렸다.
11 도요토미 히데카쓰(豊臣秀勝)
도요토미 히데카쓰는 1591년부터 1592년에 사망할 때까지 기후성의 성주였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의 누나의 아들로 오다 노부나가의 조카딸인 오에요(1573~1626)와 결혼했다. 능력이 뛰어난 무장이었던 히데카쓰는 많은 전투에서 명성을 날리며 처음에는 단바 가메 산성(교토부)을, 이어서 고후성(야마나시현)을 하사받았다.
1591년 초, 히데카쓰는 기후성의 성주가 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1년 후, 히데요시의 명으로 히데카쓰는 기후성의 가신들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출병했다가 체류하던 거제도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히데카쓰의 사후, 기후성은 오다 히데노부(1580~1605)가 물려받게 되었다.
12 오다 히데노부(織田秀信)
기후성의 마지막 성주는 1592년부터 1600년까지 성을 통치했으며 어릴 적에는 산보시(三法師)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오다 히데노부였다. 히데노부의 아버지 노부타다(1557~1582)와 할아버지 노부나가(1534~1582)가 혼노지 절과 니조성에서 아케치 미쓰히데(1528~1582)의 배신으로 사망했을 때, 히데노부의 나이는 고작 2살이었다. 노부나가와 그의 장남 노부타다가 죽은 뒤, 차남 노부카쓰(1558~1630)와 삼남 노부타카(1558~1583) 사이에서 후계자 다툼이 벌어졌다. 누가 오다 가문의 정당한 후계자인지를 논의하기 위해 기요스성(아이치현)에서 열린 회의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는 아직 아이에 불과했던 히데노부(산보시)가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히데노부가 오다 가문의 후계자가 되었으나, 그 정치적 권력은 히데요시가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히데노부가 기후성의 성주였던 1600년 당시에 기후성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이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끄는 서군을 쓰러뜨리는 데 있어서 중요한 거점으로 여겨졌다. 이 때문에 서군에 속해 있던 기후성은 같은 해 세키가하라(기후현) 전투가 발발하기 직전에 동군 측의 후쿠시마 마사노리(1561~1624)와 이케다 데루마사(1565~1613)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었다. 피로 얼룩진 성의 마루청은 성안에서 전사한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후에 기후시 시내에 있는 소후쿠지 절의 천장널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전투 후, 성에서 쫓겨난 히데노부는 세상을 등지고 출가했지만, 그 후 불과 5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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